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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한국군 위안부 上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한국군 위안부 (上) **국군 공식 사료에 대해 계속 반대+신고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각종 역사글이 올라오는 대기자료 게시판에 대해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다"는 신고사유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박하실거면 똑같이 공식 사료를 들고와서 반박해주세요. ‘종군 위안부’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강제동원한 한국인 군 위안부(성노예)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것이, 학교에서 위안부 강제동원은 일본군에 의해 운영된 제도로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군도 6.25 전쟁 당시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국군 위안부’는 분명히 존재했던 사실이다.

(▲1956년 출간된 ‘후방전사(인사편)’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발행 겸 편집인이 육군본부 군사감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1. 육군본부가 펴낸 <후방전사> 1956년 육군본부는 한국전쟁 당시의 후방 상황을 담은 공식 기록인 <후방전사: 인사편>에서 ‘특수위안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해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됐다'>< '1주에 2회 군무관의 협조로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을 받고 성병에 대하여는 철저한 대책을 강구했다'> 당시 특별 위안대의 설치·운영 책임자는 육군본부 후생감(휼병감)이었다. <후방전사>에 따르면 1952년 위안소를 찾은 국군 장병 수는 20만4560명이었다. <후방전사>에는 서울 1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 (총 79명)이라는 기록,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1개 소대 (총 89명)이라고 적은 표가 등장한다.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한성대 김귀옥 교수는 “춘천, 원주, 속초 등의 위안부와 1953년 서울에 추가로 설치된 4개 소대를 합하면, 전국 위안부는 약 300명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한다.

(▲후방전사(인사편)’의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 통계표를 김귀옥 한성대 교수가 정리한 표.)

(▲‘육·이오사변 후방전사(인사편)’에 실려 있는 단기 4285년(1952년)의 ‘특수위안대 실적 통계표’) 2. 당시 참전군인들의 회고록과 증언

1)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 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준다. 물론 훈장을 받았다면 당연히 우선권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 <모든 입과 귀가 위안부대로 쏠려 있었다. 용감한 박판도 중사도 규정대로 두 장의 티킷을 받게 되었고, 첫 번째로 위안소에 가게 되었다. 난 당시 연대장이었으니 이 얘긴 후일 대대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런데 박중사는 숫총각이라 위안부 상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다. 한번 위안부대를 다녀온 박중사가 완전히 맛을 들인 것이다. "저…, 소대장님. 저…,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이 지경까지 되어 내게 보고가 올라오니 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 그놈 참. 그래 대대장이 알아서 두어 장 더 집어줘…. 하하하…."> 2) 차규헌 장군의 회고록 <전투> <잔적을 완전히 소탕한 후 예비대가 되어 부대 정비를 실시하고 있을 때 사단에서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 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 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 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 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 3) 한인수 장군 <격량의 세월과 인샬라> <어느 날 오후에 중대장이 소대장들을 소집하여 도장이 찍힌 표 한 장씩을 주면서 오늘 저녁에 즐기러 가자는 것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몇 살씩 더 많은 소대장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쪽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고 나만 몰랐던 것 같다. 저녁에 중대장을 따라서 1.5km 떨어져 있는 연대본부 지역에 도착해 보니 25인용 천막 네 개가 나란히 처져있었느데 세 개의 천막에는 사병들이 줄을 서있고 한 개의 천막에는 장교들이 줄을 서있었다. 사병들은 안을 기웃거리며 안에다 대고 '빨리 나와! 빨리 나와!' 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 수 있었다. 천막에 들어가서 여자에게 표를 주고 10여 분간 즐기고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한국군 '위안부' 외에 연합군 '위안부'도 있었다. 보건부가 1951년 10월10일에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이란 문서는 '위안부'를 위안소에서 외군을 상대로 위안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자'로 정의하고 있다. 연합군 '위안부'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일터를 옮기거나 여행할 경우에 보고해야 했다. 3. 그렇다면 위안부 여성 동원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는가?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군과 미군이 체포한 인민군 간호원 2명. 당시 체포된 북한 여성의 일부는 강간당하거나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한국전쟁 직전에 당시 38선 이남인 옹진반도를 방문해 여학생들의 영접을 받은 유엔 현장시찰단.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미군과 한국군의 일부 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일부 여학생들을 '특수목적'으로 대동 월남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성대 김귀옥 교수는 ‘위안부’ 여성들이 직업 여성이 아니라 대부분 납치된 여성이라고 본다. 김 교수의 증언 채록과 사료 연구에 따르면 목격자들은 ‘위안부 여성들은 치장하지 않은, 매우 어린 여성으로 보였다’고 말했으며, 당시 의대생이던 정 모 씨는 자신이 피난을 가지 못한 학생들과 인민군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위안부가 될 뻔했다고 밝혔다. < “○○여대다. ○○여중생이다 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국군들은 우리를 인민군에게 버림받은 찌꺼기로 여겼다.> 속초 주민들과 주둔하던 미군 폴 팬처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시청 인근에 있던 군 위안부 앞에 육군이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이들은 부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낮에는 밥과 빨래 등 일을 노예처럼 하고, 밤에는 성착취를 당했다> 따라서 당시 국군은 북한 출신 여성들, 혹은 '인민군 협조여성' 들에게 낮에는 빨래와 요리, 밤에는 성착취를 강제함으로써 '국군 위안부' 제도를 이념적 대립구도 속 '처벌'의 하나로 사용했던 것이다. 4. '국군 위안부'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해방이후 우리나라 역대 육군참모총장은 제1대부터 제21대까지 "전부" 일본군 혹은 만주군 복무 경력이 있다. 특히 초대 이응준 총장(1948-1949)부터 제10대 백선엽 총장(1957-1959)까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고, 일본군/만주군 복무 계급도 대좌(대령), 중좌(중령), 소좌(소령), 대위, 중위까지 전부 장교 출신이다. 이들이 일본군에 의해 운영된 종군 위안부 제도를 몰랐을 리 없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일본군처럼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던 것이다. 특히 국군 병사들이 '위안소'를 다수 이용한 사실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일본군이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 동원한 '종군 위안부'의 문제가 단순히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국의 서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여성에 가한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일본 뿐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만연하던 여성에 대한 성적 도구화와 착취의 구조가 일본군 위안부 및 국군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지적하자는 것이다. 침략자-피식민지 구도로는 한국군 위안부의 등장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국방부는 "사실 확인이 어렵다", "육군에서 언급할 사항이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귀옥. 2020. “일본식민주의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미친 영향과 과제”『사회와역사』103호. 85-116. 김귀옥. 2019.『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식민주의와 전쟁, 가부장제의 공조. 도서출판선인 김주연. 2020. “70년간 외면한 한국군 위안부 300여명.."아픈 과거사 직면할 때"” 『서울신문』(6월 25일). 정진아. 2017. “‘위안부’ 문제를 읽는 세 가지 코드: 식민주의, 전쟁, 군사주의”한국여성학 제33권 제3호. 455-464. 이재호. 2015. "누가 한국군 위안부로 끌려갔나" 『프레시안』(1월 8일). “[군사대로]”전쟁기념관이 숨긴 부끄러운 6·25 이야기” 『뉴시스』(7월 13일).

출처: 웃긴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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